생 폴 드 방스 입구
대부분의 여행이 그렇듯이 ‘무엇을 해야겠다’ 내지는 ‘무엇을 보아야겠다’는 계획이 없을수록 여행은 여유로워 지고 때때로 기대치 않았던 감동이 더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준비를 많이 할수록 여행이 알차지는 것은 분명한데, 준비를 하지 않았을 때 더 진한 여운의 추억이 남겨지기도 한다. 살짝 모순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원래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고 하지 않던가. 기대하지 않았을 때는 작은 감동도 크게 느껴지게 마련이니까.
남프랑스의 작은 마을 생 폴 드 방스 St. Paul de vence의 방문은 대체로 후자에 가까웠다.
남프랑스를 대표하는 휴양 도시 니스를 방문하면서 마음먹었던 것은 주변의 작은 마을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 먹은 데는 방 안의 책장에도 꽂히지 못해 박스 안에 뒹굴던 오랜 자료들을 정리하다 프랑스 관광청에서 발행된 남프랑스 안내 브로셔에 소개된 작은 마을들이 한눈에 쏘옥 들어온 탓도 있었고, 여행을 앞두고 검색해본 인터넷 여기저기에도 남프랑스 작은 마을들에 대한 여행자들의 찬사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니스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어디를 갈지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방문해 본 적이 있는 에즈, 앙티브 등을 제외하고 보니 마땅히 어디를 가보는 것이 좋을지 결정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머문 니스의 한인 민박집 벽에 붙어 있는 ‘생 폴 드 방스’ 하루에 다녀오기란 글이 보였다. 생 폴 드 방스는 이미 출발 전 눈 여겨 보아두었던 곳. 숙소 벽에 니스에서 어떻게 가야 하는가 까지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니 고민할 것 없이 이곳으로 행선지를 결정하게 되었다.
니스의 시외버스 터미널
이른 봄의 햇살이라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좋았던 니스의 아침햇살을 맞으며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 니스의 시외버스 터미널은 남프랑스의 해안 마을들을 연결해 주는 많은 버스들이 출발하고 도착하는 곳이었지만 의외로 한산했다. 생 폴 드 방스로 향하는 400번 버스에 올라 기사에게 티켓을 구입했다. 터미널과 마찬가지로 버스에도 몇 명 되지 않는 여행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버스의 출발 시간이 임박하자 어디선가 사람들이 하나 둘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고, 버스 기사는 ‘쌩 뽈’을 반복하며 승객에게 잔돈과 영수증을 거슬러 주느라 분주해졌다. 반복되는 기사의 말소리를 듣다 보니 생 폴 드 방스란 마을 이름이 방스 지방의 생 폴이란 의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제서야 승강장 안내판에 Vence 행이란 표시가 붙어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니스를출발한 버스는 해안가를 따라가며 시원스런 풍경을 제공했다. 멀리 니스 공항에서 뜨고 내리는 비행기의 모습이 바다를 배경으로 제법 그럴 듯 해 보인다.
어느 순간 해안가를 따라서 이동하던 버스가 방향을 틀었다. 내륙을 향해,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언덕을 향해 달려간다. 바다가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부터 버스 안팎의 풍경이 달라졌다. 버스는 자그마한 마을에 멈춰서기를 반복하고 버스 안은 하교길 어린이들로 붐빈다. 피부색과 머리카락 색 그리고 들리는 말소리가 다를 뿐이지 우리나라의 시외버스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시끌시끌하던 버스가 다시 조용해질 무렵. 버스는 목적지인 생 폴 드 방스에 도착했다.
버스 기사의 안내 멘트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르르 내리는 여행자들을 따라 내리고 보니 바로 목적지였다.
생 폴 드 방스의 첫인상은 평범한 듯 개성이 넘쳤다.
덩그러니 버스 노선도 하나 붙어 있는 정류장이 평범했다면, 돌 벽에 담쟁이 넝쿨 어우러진 레스토랑이 인상적이었고, 야트막한 붉은 기와 지붕이 건물들이 무난했다면, 그 건물벽에 붙어 있는 간판들이 범상치 않았다.
또 한번 사람들을 따라 포장된 길을 걸어가니 저 멀리 어렴풋이 성벽과 그 성벽 위로 삐죽삐죽 솟아 있는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 입구
마을 입구
생 폴 드 방스는 원래 중세 시대의 요새였던 곳으로, 바다를 통해 내륙으로 이동하는 적을 감시하고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성 안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곳에 전세계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은 마티스, 샤갈, 르느와르, 모딜리아니 등의 화가와 영화감독, 배우들이다. 지중해의 바닷바람과 프로방스의 화사한 햇살로 가득한 이곳은 화가들의 작품활동지로 인기를 끌었고, 이브몽땅, 로저무어 등 유명 연예들의 휴양지로 인기를 얻었던 것이다.
마을 입구 다다를 즈음 범상치 않은 차들이 스쳐 지나간다. 차량들이 멈추는 곳을 보니 바로 콜롱브 도르 La Colombe d’Or호텔이다. 우리말로 황금비둘기라는 의미를 지닌 이곳은 원래 Le Robinson이란 이름의 여인숙이었던 곳으로 1920년대에 화가들이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화가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 머물렀던 화가들로는 샤갈, 마티스 등이 있으며, 이들이 숙박비 대신 주고 간 그림들로 후에 제법 큰 부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작은 여인숙이었던 이곳은 1932년 지금의 황금비둘기로 이름을 바꾼 후로 지금까지 생 폴 드 방스를 방문하는 유명인들의 숙소로 여전히 인기와 명성을 얻고 있다고 한다.
황금비둘기 호텔을 지나니 자그마한 광장이 나오고, 광장 한 켠으로 우뚝 솟은 사이프러스 나무에 둘러 쌓인 작은 건물이 나온다. 종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교회로 사용되었던 곳이라 짐작되나 지금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흙 바닥의 작은 광장을 지나니 본격적으로 돌 벽에 감춰진 생 폴 드 방스 마을의 입구가 나타난다. 입구에 있는 낡은 대포가 이곳이 적을 물리치던 요새였음을 알려준다.
드디어 입구. 그늘진 돌 벽 사이의 터널 길을 지나자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서 본 듯한 지금의 풍경. 그랬다. 바로 관광청에서 나온 홍보 브로셔의 표지를 장식했던 사진 속 풍경이었다. 돌 길과, 돌로 지어진 건물 사이로 난 좁은 골목. 그리고 건물 마다 붙어 있는 예쁜 간판들.
마을 입구서부터 이어진 그랑거리(Rue Grand)를 따라 이 숨겨진 산 속 마을 가운데로 걸어갔다. 말이 그랑(불어로 크다는 의미)이지 길은 두세 명이 지나갈 정도의 폭이었지만, 다른 골목들을 살펴보면 적어도 이곳에서는 이 길이 그랑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생 폴 드 방스 골목 풍경
돌 길 바닥 모습. 예쁘게 장식되어 있다
이 마을이 예술의 마을로 불리는 이유는 오래 전 유명한 화가들이 머물렀던 이유도 있겠지만, 마을 규모에 비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갤러리들도 그 이름에 한 몫을 하고 있다. 실제로 골목의 가게들 중 한집 건너 하나씩 갤러리들이 있다고 할 정도로 많았고, 각각의 갤러리마다 고유한 색채의 작품들을 전시, 판매하고 있었다.
독특한 무늬의 돌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니 광장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공간이 나왔고, 너무 작아 식수대로 착각할 만한 크기의 분수가 있었다. 무언가 마을의 상징물쯤 되는 것 같아 안내판에 다가가 보니 ‘헉’하는 웃음이 삼켜진다. 이 분수의 이름은 “Grande Fontaine”, 우리말로 대분수였다. 이름과 눈앞의 분수 모습이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듯 하지만, 산꼭대기 돌로 만든 요새 안에서는 이 분수의 물줄기가 가장 굵고 풍부한 물줄기였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아기자기하고 화사한 프로방스풍의 가게들을 지나쳐 간 곳은 마을 끝의 공동묘지. 마을 밖의 풍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이 공동묘지에는 샤갈의 묘지가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공동묘지 방문을 좋아하는 탓에 망설임 없이 묘지 안으로 들어가 샤갈을 만나보기로 했다. 고흐의 묘지가 있는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공동묘지가 그랬듯이 이 곳 또한 유명인의 묘지가 함께 있을 뿐, 대부분은 마을 사람들의 묘지들이다. 세계적인 거장의 묘지는 눈에 쉽게 띌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샤갈의 묘지를 찾을 수가 없다. 생각보다 넓은 묘지를 샅샅이 찾아보다가 결국 공사하는 인부들에게 물어보니 그냥 저쪽이라고 이미 지나온 입구를 가리킨다. 포기하는 마음으로 두리번거리며 입구로 발걸음을 돌려 나오다 보니 비슷한 시간에 공동묘지에 들어섰던 외국 여행자들이 손짓을 한다.
‘아! 저기였구나.’
세계적인 대화가 샤갈의 묘지 앞에 섰다.
이러니 지나쳤지 싶을 정도로 평범했다. 아니 주변의 여느 묘지보다 초라했다. 유럽의 공동묘지 어디에서나 유명인의 묘지에는 시간을 초월해 추모하는 사람들이 놓고 간 꽃다발이 있기 마련인데, 이곳에 꽃다발 하나 있질 않았다. 어렵게 만난 샤갈이었는데 초라해 보이는 묘지를 보니 허전한 마음마저 든다. 그냥, 오늘만 이런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제까지, 그리고 내일부터는 다시 화사한 추모의 꽃다발이 놓여져 있을 거라고.
공동묘지와 샤갈의 묘지.
마을에서 가장 넓은 대로를 따라, 마을의 가장 끝까지 둘러보았다. 너무 빨리 걸었나… 고작 30여 분이 지나 있었다. 걸어온 길을 피해 좁은 골목을 오가며 새로운 길을 찾아가며 돌아갔지만, 결국 골목은 대로와 이어졌다. 그리고 그 골목들마다 ‘예쁘다’, ‘멋지다’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가게들이 있었고, 건물들의 돌 벽 사이사이로는 저 멀리 황토색 지붕의 마을들이 내려다 보였다. 요새 안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의 풍경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느릿느릿 이 작지만 아름답고 개성 넘치는 예술의 마을을 둘러보고 다시 입구로 내려오니 1시간여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애걔’했을 텐데 이곳에선 내가 너무 서둘러 보았나, 너무 빨리 걸었나 싶은 생각과 함께 한번 더 둘러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저녁에는 영화제가 열리는 칸느에 갈 계획이었기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마을을 벗어났다.
생 폴 드 방스는 작정을 하고 찾아간 곳이 아니었다. 남프랑스의 작고 예쁜 마을을 가보고 싶었고, 그러다 생 폴 드 방스를 오게 되었고, 그래서 마땅한 정보도 없는 방문이었다. 몇 곳 안내 표지가 붙은 명소가 있었지만, 그조차 기억에 남을만한 곳은 아니었고.
생 폴 드 방스에는 추천할만한 명소가 없다. 아니 명소가 필요 없다. 돌 길 바닥도 볼거리고, 돌로 만들어진 건물 벽 하나하나에 기대면 예외 없이 멋진 사진이 남겨지고.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처럼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찾아보긴 힘든 곳이지만, 유명화가의 작품 못지 않은 멋진 예술작품들을 전시한 갤러리가 마을을 가득 메우고 있는 곳이 바로 생 폴 드 방스였다.
편한 신발과 느린 걸음. 그리고 좁을 골목의 가게 앞에 오래 멈춰 서서 충분히 구경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생 폴 드 방스에 가려는 여행자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준비물이다.
생 폴 드 방스의 모습들
유럽여행. 야간 열차의 추억 (0) | 2013.04.29 |
---|---|
파리의 카페 Old & New 1편 -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파리의 카페들 (0) | 2007.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