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 파리로 가는 야간열차가 플랫폼에서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 비포선라이즈(Before Sunrise)가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와 에단호크는 공통점이 없지만,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저 소녀는 줄리델피 만큼 예뻤다.
파리의 베르시역(Gare de Paris Bercy).
파리를 떠나 피렌체행 야간열차를 타기 위해 베르시역으로 향했다.
리옹역의 포화로 만들어진 베르시역은 평범한 외관과 작은 규모의 역이다. 시내 중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고, 이곳을 이용하는 열차편도 많지 않아서 역 주변이나 역 안 모두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둘러볼 곳도 없었고, 마땅히 할 일도 없었기에 기다리던 피렌체행 야간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하자 마자 서둘러 예약해둔 쿠셋(couchettes) 자리를 찾아 열차에 올랐다.
쿠셋은 일종의 간이 침대로 유럽의 야간 열차들은 1인, 2인 그리고 3인실로 된 침대칸 외에 4인실, 6인실로 구성된 간이 침대 칸을 운영한다.
예약한 쿠셋 칸으로 들어서다 보니 참으로 예쁜 아가씨가 쳐다보며 미소를 짓는다.
순간 스쳐가는 생각.
‘영화 비포선라이즈에서는 에단호크와 줄리델피는 기차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거늘.’
유럽에서 기차를 타고 다닌 지난 10여 년 동안 이런 미인과 같은 칸에 머물러 보기는 첨이었다.
더욱이 열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후에도 더 이상이 사람이 타지 않았고, 이젠 이 아리따운 처자와 피렌체까지 긴 밤을 지새며 단 둘이 가야만 할 운명, 아니 행운이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탄 피렌체행 야간열차는 아테시아 나이트(Artesia Night)라고 불리는 열차로 파리와 이태리 구간을 오가는 야간 열차다. 통상 침대칸의 경우 남녀 구분이 있지만, 간이 침대칸은 남녀 구분이 없다. 때문에 불편하고 쑥스러웠던 적도 있었지만, 이런 기분 좋은 순간도 찾아 온 것이다.
파리에서 피렌체까지. 내게도 비포선라이즈 속의 주인공 같은 멋진 인연이 찾아올까?
물론, 아니었다.
유럽의 기차들은 대부분 방으로 나뉘어진다. 단거리 구간 열차나 고속열차 등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의자들이 일렬로 배치된 살롱형 구조지만, 장거리나 조금 오래된 열차들은 침대칸이 아니더라도 컴파트먼트라 불리는 방 형태로 되어 있다. 방 안은 보통 3개의 의자가 마주보고 있는 구조로 총 6개의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쿠셋 칸 역시 방 형태로 되어 있고, 야간 도난 사고를 대비해 문에는 잠금 장치도 되어 있다.
동양 남자와 서양 여자.
방안의 분위기는 어색함이 가득했다.
영화 속 낭만적인 분위기는 애당초 존재하질 않았고, 그 어색함 탓에 열차가 출발한 후에도 문을 열어 놓은 채로 가지고 있던 여행책자만 뒤적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그녀였다.
슈퍼마켓에서 사온 듯 6개들이 작은 생수 묶음에서 하나를 꺼내더니 미소 띤 얼굴로 내게 권한다.
당장은 목이 마르지 않았지만 건조한 객실에서 긴 밤을 보내려면 생수 한 병은 필수적이다. 마침 사둔 생수도 없었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생수 한 병을 건네 받았다. 설령 나에게 생수가 충분히 있었더라도 거절하진 않았겠지만.
생수 한 병을 빌미로 대화를 시작해 보았다.
오... 이런.
한 두 마디가 오가자 마자 둘 서로 대화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말았다.
그녀는 로마에서 파리로 유학 온 학생. 당연히 이태리어를 잘하고 프랑스어도 잘 한다. 그런데 영어는 거의 하지 못했다.
그 후로 한 시간 여.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어렵사리 이어간 대화 내용은 그녀는 턱없이 어린 고등학생이었고, 로마의 집으로 잠시 다니러 가는 길이란 게 전부.
이미 머릿속에서 비포선라이즈가 지워진 지는 오래다.
조금 지나 피렌체로 가는 길에 있는 프랑스 디종에 열차가 멈춘다.
그제서야 두 명의 남녀가 우리 객실로 들어온다.
그들도 어색한 방 안 분위기를 느꼈을까?
자신들은 부부고, 로마로 여행가는 길이고, 남편은 영어도 할 줄 아니 자기들이 통역을 해주겠단다.
‘음 도대체 뭘 통역한다는 거야?’
마땅히 할 말도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등장한 통역 부부로 인해 무슨 말인가 더 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껴가며 대화를 쥐어 짜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밤은 깊어갔고, 눈뜨면 시작될 새 여행지에서의 하루를 위해 우리 모두 잠들어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한쪽 편의 1층, 2층 간이 침대를 부부에게 내어주고, 반대편 2층을 내가 쓰기로 했다.
2층으로 올라가 신발을 벗고 시트를 덮고 잠을 청하려니 영화를 떠올리며 잠시지만 좋아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피식 하며 웃음이 났다.
그리고 지난 시절 유럽 배낭여행을 하며 겪었던 야간 열차의 추억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의자를 붙여서 잠자던 시절.
더 오래 전. 학생시절. 20킬로에 육박하는 배낭을 짊어지고 유럽을 여행할 무렵에는 간이 침대칸이 아닌 일반 컴파트먼트 객실을 이용하곤 했다. 당연히 돈 때문으로 간이 침대칸은 예약비가 비쌌고, 일반 객실은 유레일패스 소지자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열차의 컴파트먼트 객실 의자는 앞으로 당기면 양편의 의자가 거의 맞닿을 정도까지 펼쳐지기에, 같은 객실 승객과 이야기를 하여 의자를 펼치고 누워서 갈 수도 있었다. 이때 1등석과 2등석이 조금 차이가 나는데, 1등석 의자를 완전히 맞닿았지만 2등석은 중간에 공간이 생겨서 잘못 누우면 다음날 허리가 아프기도 했었다. 때론 그 불편함을 참지 못해 의자 아래 공간에 들어가서 자는 친구도 있었다. 딱딱한 열차 바닥이 더 불편했을텐데…
조금 더 편하게 이용하기 위해서, 또는 도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우리나라 여행자들은 뭉쳐서 함께 열차를 타곤 했다. 우리나라 배낭여행자들이 대부분 여름방학 기간에 몰리는 탓에 그 무렵엔 야간열차를 타러 가면 플랫폼에서 우리나라 여행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행선지가 같은 것이 확인되면 4명 이상 뭉쳐서 같은 컴파트먼트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예약자가 없는 방으로.
그 다음은? 치졸한 이야기지만, 문을 닫고 커튼을 쳐서 다른 여행자들이 우리 칸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는, 각자 슈퍼마켓에서 사두었던 비상식량들을 나눠먹으며 우리만의 여행 무용담을 나누기도 했었다. 당시에는 여행자들 가장한 도둑들이 야간열차에 많았던 탓에 아예 문에 테이프를 붙이기도 했고, 늦은 시간 차장의 표검사가 귀찮아서 창문에 열차티켓(유레일패스)을 붙여 놓고 잠들기도 하고…
일부 여행자는 두 세 명이 6명이 들어가는 방을 차지하고는 외국인 승객의 동석을 막아서 비난을 받기도 했었고, 왜 꼭 한국 여행자들은 외국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기네끼리 뭉치냐는 원론적인 자성도 있었다.
몇 해 전부터는 야간열차들이 대부분 침대칸과 간이 침대칸만을 운행하고 있다. 이제 의자를 붙여 자거나, 방문을 닫고 뭉치던 시절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동승한 승객운도 복불복?
이태리 로마에서 스위스로 가는 야간열차를 탔을 때였다.
여행경험이 많아진, 제법 베테랑 여행자였기에 외국에서 외국인과 같은 침대칸을 사용하는 것 정도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날 4명이 함께 사용하는 쿠셋 칸에는 이태리 아저씨 한 명과 그의 아들. 그리고 또 다른 이태리 아줌마 한 명 그리고 내가 있었다.
오… 맙소사.
말썽꾸러기 아들을 혼내는 아저씨의 큰 목소리가 계속되더니, 잠시 후 서로 처음 본 아저씨와 아줌마가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2층에 올라가 누웠던 나로써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태리 말 소리가 충분하게 짜증스러웠고, 점입가경으로 그 칸은 실내 등이 고장 나서 꺼지질 않았다.
2층에 누운 내 눈앞에서는 밤새 꺼지지 않는 조명이 화사했고, 나름 목소리를 낮추어 얘기하려고 노력하는 듯 보여도 충분히 신경 쓰이는 말소리는 밤새 계속되었다.
자정 무렵.
지나가던 승무원과 잠 못 자던 나의 눈이 마주쳤을 때. 그때 분명 승무원의 눈 빛은 동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음날 아침. 퉁퉁 부은 눈으로 새 여행지를 만나야 했다.
잘 구겨져야 베테랑이다
나름 유럽에, 유럽의 열차에, 그리고 야간열차에 익숙하다고 자부할 무렵.
스위스에서 파리로 가는 야간열차의 간이 침대 칸은 주말을 파리에서 보내려는 여행자들로 가득했다. 1등석 패스를 가지고도 자리가 없어서 2등석 칸에 자리를 잡은 내가 3층 침대로 올라가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짐 정리를 할 때였다.
키가 19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남자 여행자가 들어왔다. 그의 자리는 내 자리 건너편 3층 침대. 앉아 있기도 불편할 만큼 천정이 딱 붙어 있는 이 공간에 저 남자가 어떻게 자릴 잡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능숙한 몸짓으로 3층으로 올라와 누운 듯 앉아서 양말 같아 신고, 옷 갈아 입고, 잠자리 정리하고.
내가 가까스로 양말 벗고 시트를 펴는 사이에 그 남자는 이미 누워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는 간이 침대칸의 베테랑이었다. 입 속에서 찬사가 맴돌 뿐.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새우잠을 청하면서도 너무도 편해 보이던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여행의 베테랑이 되려면 구겨져 자는 것도 잘해야지 싶었다.
아리따운 이태리 소녀와 친절한 프랑스 부부와의 열차 여행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끝이 났다.
열차에서 제공해주는 빵과 음료의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여전히 어색한 눈 인사를 끝으로 피렌체에 도착했다. 나를 내려준 열차는 다시 로마로 향해 떠나고. 차창 밖으로 다시 한번 눈 인사를 나누고 짧은 인연을 마쳤다.
유럽에서는 점점 야간열차가 없어지고 있다. TGV 등 고속 열차 노선의 확대로 이동 시간이 짧아진 탓이라고 한다. 이미 컴파트먼트는 대부분 없어졌고, 간이 침대칸 열차도 상당수 사라졌다.
당연히 더 편리해지고 있는 것일 테지만, 어쩌다 한 번 유럽을 여행하는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긴 밤을 짧게 느껴지게 해주는 길동무들과의 추억도 그립고, 밤새워 불편하게 달려온 후 맞이하는 새로운 여행지의 아침 공기가 전해주는 상큼함도 아쉽다.
다른 지역에 비해 쉽게 변하지 않는 여행지가 유럽이다. 백 년 넘는 건물들로 도시가 가득하고, 10년 전에 갔던 음식점이 변함없이 그대로인 곳.
하지만 그곳들도 변한다.
누군가 앙코르와트를 가보라고 하면서, 더 변하기 전에 가봐야 하지 않겠냐고 했었다.
하지만 유럽도 마찬가지일 듯 하다.
더 변하기 전에. 더 편해지기 전에 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없어지기 전에 야간 열차도 한 번쯤 타보고 말이다.
p.s
이 글은 몇년 전 언 언론사의 인터넷 사이트에 기고하였던 글입니다.
이제는 이미 대부분의 야간열차가 사라져 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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